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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은 늘었고, 몰입은 사라졌다

생산성은 늘었고, 몰입은 사라졌다

요즘 일을 하면서 자주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일을 하고 있는데,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분명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고, 화면에는 코드가 쌓이고 있고, 결과물도 나온다. 그런데 하루를 마치고 나면 묘하게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 든다. 손은 분주했는데 머리는 비어 있는 듯한, 그런 위화감.

도둑맞은 집중력

오래 전에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은 ‘몰입’에 대해 길게 말한다. 한 가지 일에 깊이 빠져드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시간이 사라진 현대인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그땐 끄덕이며 읽었다. 스마트폰, 알림, 짧은 영상, 끊임없이 끼어드는 메시지.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요즘 그 책의 문장들이 자주 다시 떠오른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다.

AI와 함께 일한다는 것

AI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뒤로, 일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코드는 더 빨리 짠다. 모르는 라이브러리도 빠르게 익힌다. 한 번에 더 많은 일을 처리한다.

회사에서는 흩어져 있던 히스토리를 파악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예전 같으면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거나, 며칠씩 코드와 문서를 뒤져야 알 수 있던 맥락을 이제는 비교적 빠르게 끌어모을 수 있다. 문서를 정리하는 일도 한결 가벼워졌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만들고 싶었던 프로젝트를 훨씬 빠르게 만들고, 또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머릿속에만 머물던 아이디어가 동작하는 무언가로 옮겨가는 속도가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이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생산성은 분명히 올랐다. 예전이라면 며칠 걸렸을 작업을 하루 안에 끝내는 일도 흔해졌다.

AI는 이제 일하는 모든 자리에서, 협업의 기본값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었다.

터미널 여러 개를 띄워놓고

문제는 일하는 모양새가 바뀌었다는 데 있다.

요즘의 내 모니터에는 항상 터미널이 서너 개 떠 있다. 하나는 A 작업을 시켜놓고, 답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터미널에서 B 작업을 시작한다. B가 굴러가는 사이에 또 다른 창에서 C를 본다.

A의 결과가 나오면 검토하고, 다시 지시를 내리고, 그 사이에 B의 결과가 올라온다. 다시 그쪽으로 주의를 옮기고, 잠시 후엔 C로 돌아온다.

손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고, 화면은 빠르게 바뀐다. 서너 가지 일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겉으로 보면 꽤 효율적인 풍경이다. 실제로 결과물도 많이 나온다.

한 가지 일에 머무를 수 없다

그런데 그 안에 ‘몰입’은 없다.

어떤 작업도 끝까지 파고들지 않는다. 하나의 문제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옆 터미널에서 다른 일이 끝나 있다. 그쪽으로 주의가 옮겨간다. 다시 돌아왔을 때, 조금 전까지 따라가던 생각의 흐름은 이미 흩어져 있다.

생각이 깊어질 시간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깊어지기 전에 다음 일이 끼어든다.

예전에는 하나의 버그를 붙잡고 몇 시간씩 코드를 들여다본 적이 있다. 답답하긴 했어도, 그 시간 안에서 점점 머리가 또렷해지는 감각이 있었다. 끝내고 나면 그 문제에 대해 분명히 조금 더 깊어진 내가 있었다.

요즘은 그런 시간이 거의 없다. 빠르게 답을 얻고, 빠르게 넘어간다. 결과물은 쌓이지만, 그것을 내가 만들었다는 감각은 점점 옅어진다.

재미는 어디서 왔을까

문득 이런 자문을 하게 된다. 나는 일을 하면서 언제 가장 재미있었을까.

며칠을 붙잡고 있던 버그를 끝내 풀어냈을 때. 머릿속에 그리던 서비스를 한 줄, 한 줄 직접 쌓아 올려 동작하게 만들었을 때. 도무지 안 풀릴 것 같던 문제가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정리되어, 코드로 옮길 일만 남았을 때.

돌아보면 재미있던 순간들은 대체로 비슷한 모양이었다. 오래 머물렀고, 오래 막혔고, 오래 끝에 풀렸다.

빠르게 끝낸 일들 중에는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사라진 건 몰입이 아니라 성취감일지도

며칠 전, ‘AI 시대, 개발자는 어떻게 다시 성취감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개발바닥 영상을 봤다.

영상의 이야기를 내 식대로 정리하면 이렇다. 성취감은 어려운 문제에 직접 부딪혀 풀어낼 때, 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깊이 파고들 때 온다. AI를 쓰면 그 부딪힘의 시간이 짧아진다. 답이 너무 빨리 나와버린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더 어려운 문제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성취감은 점점 새어 나간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며칠째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내가 요즘 느끼는 위화감의 정체는, 어쩌면 몰입의 부재 그 자체가 아니라, 몰입의 끝에 따라오던 성취감을 잃었다는 쪽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빠르게 처리한 일들은 끝나는 순간 그냥 사라진다. “내가 이걸 해냈다”는 감각이 따라오지 않는다.

손에는 결과물이 남는데, 마음에는 아무것도 안 남는다.

일을 했다는 감각

하루를 마치고 나면 분명히 많은 일이 끝나 있다. PR도 올라갔고, 기능도 붙었고, 문제도 해결되었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을 했냐”고 누가 물으면, 답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머릿속에 또렷이 남은 한 가지 장면이 없다.

여러 일을 동시에 굴려서 끝낸 하루는 이상하게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어떤 일도 충분히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생산성은 늘었는데, 그 하루가 내 안에 쌓이지는 않는 느낌.

남는 질문

답은 모르겠다. 다만 요즘은 자꾸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 일을 더 잘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일을 더 많이 처리하고 있는 걸까.

요즘의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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